인도의 리브가 네일러 여선교사

방가로아의 소의 전당

  

사람마다 일생을 통해 꼭 한번쯤 가 보고 싶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전혀 가 보고 싶은 흥미를 느끼지 않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는 나에게 있어 이렇다 할 관심을 끌지 못한 나라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이유를 들자면 인도는 기독교가 이미 많이 전파된 나라, 무더운 나라, 혼을 빼놓을 만큼 수많은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는 나라라는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덥고 사람이 많은 나라는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널려 있으니 그것이 적절한 이유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여하튼 별다른 이유 없이 가고 싶지 않은 나라에 또한 특별한 이유 없이 가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하나님이 나의 발걸음을 다시 인도로 이끌어 주신 것이 아니실까?


 

아내와 함께 뉴욕을 떠나 스위스를 경유해 인도의 수도 봄베이에 도착했다. 공항 터미널 밖으로 빠져 나오니 예상했던 대로 불볕 더위에 사람들이 공항 정문을 중심으로 빽빽이 둘러 서 있고 그 중 대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내 트렁크를 운반해 주겠다고 야단 법석이다.


 

목적지인 방가로아까지 가려면 다시 국내선 공항으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그곳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무턱대고 택시를 탈 수도 없고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국내선 공항으로 가는 버스가 와 다행이었다.

방가로아 행 비행기는 10시간 후에 출발이다. 만 10시간을 국내선 공항에서 기다리자니 지루하기 짝이 없다. 봄베이 시내를 둘러보러 나가고 싶기도 했지만 몸이 너무 지쳐 있어, 지루한 대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공항 대기실은 모기가 좀 날아 다니는 것 외에는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고 냉방 시설이 잘 돼 있어 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생김새와 피부 빛깔이 모두 가지 각색인데 어떤 인도인들은 거의 백인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살결이 희고 서구적으로 생겼다. 아마 오랫동안 영국인들이 와서 통치를 하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씩 절세 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이 잘 생기고 체격이 좋은 여인들이 지나 간다.

많은 여인들이 코걸이를 하고 다니는가 하면 맨 발가락에 반지를 낀 것이 신기해 보인다. 하기야 미국에는 요즘 배꼽에 반지를 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혓바닥에 구멍을 뚫어 반지를 걸고 다니는 사람도 있으니까 코걸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보기가 괜스레 이상하고 코를 풀 때 몹시 거추장스러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10시경, 뉴욕을 출발한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목적지인 방가로아에 도착했다. 병원에서 마중을 나온 지프차를 타고 방가로아 공항에서 45분 정도를 달리니 병원 건물이 밤의 그림자 자락 속에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야심(夜深)한 시각인데도 길거리에 사람이 많다. 아마 집안이 더워 바깥으로 피서를 나온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 인천에 살 때 여름철이면 동네 사람들이 고물 선풍기조차 없는 닥지닥지 붙어 있는 갑갑한 방을 피해 바다 바람이 코끝으로 스미는 시원한 거리로 돗자리를 들고 걸어 나오던 풍경이 기억 난다.

방가로아 침례 병원은 미국 남침례교에서 시작하였는데 약 150 병상을 갖추고 있는 견고하게 잘 지은 병원이다. 병원 입구에는 사람 키의 두세 배 만한 키 큰 야자수 나무가 길 양편에 즐비하게 늘어서 출입객들을 환영한다.

방가로아 병원은 다른 선교지 병원에 비해 유난히 여의사들이 많은 것이 첫눈에 뜨인다. 인도 사람들은 대체로 머리가 영리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의학 면에 있어서도 병원에서 만난 의사들의 의학 수준이 굉장히 높은 것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지식을 활용할 만한 기구와 재료가 태부족이다. 방사선과만 하더라도 전문 서적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은 많은데 실제로 방사선 촬영 환자 수가 적으니까 실제 경험이 풍부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집을 떠나 오기 며칠 전에 이 병원으로부터 세포 검사를 하는데 필요한 강의를 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의 아내 김영애 권사가 세포 검사 공부를 한 바가 있어 부랴부랴 교과서와 강의용 슬라이드를 챙겨 가지고 왔다. 아내는 국문과 졸업생인데 미국으로 건너온 후 펜실베니아 대학 병원에서 2년간 세포 검사 공부를 마쳐 전문 면허를 갖고 있다. 마침 내가 펜실베니아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아내가 무언가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세포 검사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전공 이외에 또 다른 기술을 한두 가지 갖는 것은 인생을 재미나고 유익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유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기 전공 이외에 한 가지씩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좋은 풍습이라고 여기어진다.

내가 사는 뉴저지 체리힐에서, 우리 옆집에 사는 유대인은 고등학교 선생인데 지붕 수리 기술을 배워 방학 때마다 일을 해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린다. 그리고 혹 선생 일을 중단하게 될 때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고 내게 들려 준 적이 있다.


 

 

나의 아내는 세포 검사하는 것을 배워서 대학병원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이제 그 기술로 선교지에서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방가로아 병원에는 세포 검사를 하는 사람이 없다. 아내는 병원에 머무는 2주일 동안 시내에 있는 병원과 의료 기구 파는 곳에서 필요한 재료를 구입해다가 세포 검사실을 신설해 주고 강의를 해주었는데 남편된 나로서 보기에 흡족했다.


 

우리는 병원 안에 있는 선교사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이 곳은 잘 지은 이층집이다. 이 숙소는 1973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간을 이 병원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외과 의사 리브가 네일러(Rebekah Naylor) 여의사가 쓰고 있는 집이다. 방이 여럿 있어서 우리 부부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리브가 선교사는 미국 남부에 있는 신학교 학장 네일러 박사의 무남독녀로 어려서부터 선교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외과 레지던트를 마친 후 곧 인도로 건너와 지금까지 독신의 몸으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싹싹하고 상냥한 성격에 사람 다루는 솜씨가 노련하고, 몸집이 작고 가냘픈 40대 후반의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다. 그런데 막상 일을 할 때 보면 그런 작은 몸집 어디에서 힘이 솟아 나오는지 매일 힘에 겨울 정도의 일을 해낸다. 많은 수술을 할 뿐 아니라 매일 새벽 경건회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며, 주일 예배 때에는 피아노 반주와 성가대 지휘까지도 맡아 한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선교사들의 경건회를 몸소 인도한다. 음식은 아주 소식을 하는데 어디에서 그런 힘과 정열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녀에게 암사자 선교사(Liones Missionary)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녀는 일생을 인도, 특히 방가로아 병원에서 선교를 하며 바치겠다고 한다.


 

리브가 선교사가 경건회를 인도할 때나 아니면 그저 복도에서 스치게 될 때라도 언제나 그녀는 경건하고 은혜가 충만하다는 인상을 풍긴다. 외과 의사로서나 신앙인으로서나 모범이 되는 훌륭한 선교사를 알게 된 것이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리브가 선교사와 함께 지내는 동안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이 있다. 시내 음식점에서 함께 식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식사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경건한 기독교인이라면 어디서든지 식사 기도를 해야 하고, 남의 집을 방문하면 으레 묵도를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훗날 알게 된 일이지만 공중 석상에서 식사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반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삼가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믿음이 없거나 힌두교를 믿고 있는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될 때에도 조심을 한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성경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속단하기 힘들지만 리브가같이 훌륭한 선교사가 식사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흥미로웠다.


 

아내와 나는 아침 식사는 커피와 빵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만들어 먹거나 사먹었는데 점심 식사가 문제였다. 의사들은 병원 회의실에 모여서 병원 식당의 종업원이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는데 식사는 항상 카레라이스이다. 대신 카레의 종류가 무척 다양해 색깔이 노랑, 갈색, 빨강 등 여러 가지이고 어떤 것은 무척 맵지만 어떤 것은 전혀 맵지 않고 달짝지근한 것도 있다.

공통된 것은 어떤 음식이건 코리안더(Coriander)라는 풀이 들어 있는 것과 음식에 수저가 없다는 사실이다. 코리안더는 인도 음식에 있어 한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인데 그 맛이 박하 같기도 하고 역겨운 풀 냄새가 나는 것이 도무지 비위에 거슬려서 먹을 수가 없다. 더구나 질척질척한 카레라이스를 수저가 없이 손가락으로 떠먹는데 왼손은 쓰지 않고 오른손 하나만 사용하자니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 인도 사람들은 왼손은 더러운 손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어 입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왼손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번은 어느 인도 사람 부잣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나는 옆에 앉아 친하게 된 인도 사람에게 왜 식사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더럽게 손으로 떠 먹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숟가락은 겉으로는 깨끗한 것처럼 보여도 이 사람, 저 사람, 수많은 사람의 입에 들어갔던 것이니 실상은 더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손은 나 이외에는 다른 사람의 입에 들어간 적이 없으니 숟가락보다 깨끗하다는 주장이다.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리는 말이나 억지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손으로 먹는 것이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보다 더 맛있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우리도 상추쌈을 먹을 때 큼지막하게 쌈을 싸서는 두 손으로 입이 터져라고 먹어야 제 맛이 나지, 상추쌈을 작게 만들어 숟가락 위에 올려놓고 먹어서는 별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카레라이스를 손으로 떠먹는 것은 아무래도 좀 야만스럽게만 느껴진다.


 

인도에 와서 색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됐다. 첫째는 이방인의 눈에 이상스럽게 생각되는 풍습이라도 그 나라 사람들의 풍습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어떤 풍습들은 좀더 시대에 맞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특히 교통이 발달해 나라간의 교류가 빈번하고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여행객들이 수시로 왕래하는 요즈음, 케케묵은 구습은 국제 무대에서 쉽게 용납될 수 있는 새로운 풍습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한편, 인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생의 진로와 목표가 흥미로운데 그것을 4가지 단계로 간추려 볼

즉, 어렸을 때에는 공부하고, 장년이 되면 열심히 일하고, 인생의 황혼기에는 욕심을 버려 마지막 순간에는 무아경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순진하고 깨끗한 사고 방식이자 관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기독교 교육을 받아 온 나에게는 어쩐지 다소 퇴폐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비교하면 창세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진취적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도는 아직도 문맹률이 50%나 되고 GNP 350달러의 가난한 나라이지만 5천년의 오랜 역사와 깊은 철학과 종교를 가지고 있다. 철광과 금광, 다이아몬드 등 지하 자원이 풍부하고 소수의 인도인들은 엄청나게 많은 돈과 권력을 쥐고 있어 호화스러운 성과 궁궐을 짓고 살았다.

인도는 힌두교가 80%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회교는 12%, 기독교가 2% 정도이며 불교는 0. 7%에 불과하다. 힌두교는 지극히 포괄적인 종교이다. 바다와 강의 비유가 힌두교를 잘 설명해 준다. 즉 힌두교는 바다에 해당하고 그 이외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는 강과 같아서 흘러흘러 모두가 끝내는 바다에 합친다는 관념이다.

 

따라서 힌두교에서는 유일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다신교를 인정한다. 신(神)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여서 착한 일, 명상, 기도, 종교 의식, 지적인 탐구 등 아무 일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면 가능하다는 사고 방식을 갖고 있다. 이렇듯이 포괄적이고 또한 심오하게 보이는 힌두교이지만 이들의 경배드리는 전당에 가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많다.

소를 신성시해서 철(鐵)로 만든 소의 조각 앞에 분향하고 예배드리는 것까지는 그런 대로 인정을 하겠는데, 염소와 뱀의 조각 앞에서조차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는 도무지 심오하다거나 깊은 철학을 갖고 있다는 따위의 생각은 아주 없어져 버리고 만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인도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믿게 된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가진다.


 

 

인도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벌써 2백년이나 되지만 아직도 기독교인의 수가 전체 인구의 2%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며, 왜 이곳에서 기독교가 성장하지 못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외국인의 종교이지 자신들의 종교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배척하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하다.

또한 기독교를 식민지 종교라고 배척하는 것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국인들의 악랄한 식민 정책으로 가슴 깊이 원한이 맺힌 이들에게 미국인이나 독일인이거나를 막론하고 백인이면 모두 배척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야만적인 종교, 부도덕한 종교라고 여겨 배척한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를 왜 야만적인 종교라고 하는지 그 이유가 자못 흥미롭다.

인도의 상류 계급 사람들 가운데에는 채식가들이 많다. 소를 신성시해서 소고기를 먹는 것을 야만적인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에게 소고기, 돼지고기를 주식으로 먹는 선교사들이 야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기독교를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도 재미있다. 예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동양적인 남녀관을 인도인들은 지금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남녀가 팔짱을 끼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이나, 더구나 길거리에서 입맞춤을 하는 것을 보고는 기독교는 부도덕한 종교라고 단정을 하고 배척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답답한 마음이 되었다. 기독교의 참뜻은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외국인의 것이라든지, 식민지 앞잡이라든지 혹은 풍습의 차이로 인해 쉽사리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종교로 단정을 하는 배타적인 면이 그렇고, 또한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게끔 되었던 그 동안의 선교 전략과 선교사들의 태도가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진 것이다.

하기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몇몇 선교사들의 과오가 마치 어물전의 꼴뚜기처럼 기독교인의 이미지를 흐려 놓았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면서 앞으로 인도에서의 우리 나라 선교사들의 공헌이 크게 기대된다. 한국 선교사들은 같은 동양인으로서, 인도인들이 서양 선교사들에게 가졌던 식민지 종교라는 편견도, 부도덕한 종교라는 배타적인 감정도 배제(排除)한 채, 좀더 수월하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