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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9년
그리고
90년에
이어 네번째로 케냐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모두 미국 선교 병원에 가서 봉사했지만 이번에는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의 사역으로 단기 선교팀이
2주일간
함께 일하게 되어서 더욱 특별한 의의가 있었다. 외과 의사 염극용 장로와 병리과 의사 김영훈 장로, 펜(Penn)
대학교 의과 대학생인 미미 염(염극용 장로의
2녀),
수지 정(의대생)과 나, 이렇게
5명이
한 팀이 되어 떠났다.
단기 의료 사역을 중점적으로 하기로 하고, 그 외에 찬양과 단막극, 인형극 등을 다채롭게 준비했다. 목적지는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에서
2시간
반 운전 거리인 마사이(Masai)촌이다.
이곳에 한국의 “모든 민족 선교회”(Korean
Evangelical
Mission
to
All
Nation,
KEMAN)와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가 협력해 오리니에(Orinie)
진료소를 건립한 것이다.
진료소가 건립되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이 많은 기도와 애를 썼으며 어려움도 여러 차례 겪었다. 한경철 목사님이 케냐에 오셔서 선교 사역을 하던 중에
마사이 부족에게 선교할 뜻을 갖고 계셨는데, 내가
1985년
텐웩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이로비에서 한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한 목사님과 함께 마사이 촌을 돌아보면서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 선교를 협력해서
할 꿈을 안게 되었었다.
그러고는 이듬해인
1986년,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에서 외과 의사 염극용 장로와 소아과 의사 이관우 장로님 두 분이 마사이에서 천막을 치고 환자를 치료한 것이 진료소의
본격적인 첫 시발이 되었다.
이어서 매년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에 걸쳐서
5명
내지
7명으로
구성된 단기 선교팀들이
2주일씩
와서 봉사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전미령 간호 선교사가 와서 수고했고, 그 다음에 정현숙 간호 선교사가, 그리고 백영심, 이현심
간호 선교사가 간호 사역을 담당했다.
한경철 목사님의 뒤를 이어서는 한성수, 김철수, 하영진, 이강철 목사님이 선교 사역을 맡아 했는데 그것이 “모든 민족 선교회”로 발전하고,
AIC(Africa
Inland
Church)
교단과 협력해 사역하는 선교 단체로 지금까지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한경철 목사님은 새로운 사역을 구상해 내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창조적 선교사님이요, 김철수 목사님은 어학에 특별한 은사를 받아 아프리카에 온
지
6개월
만에 스와힐리(Swahili)라는
아프리카 말로 유창하게 설교를 할 수 있었던 분이다.
전미령 선교사는 열심이 대단해 여자 혼자의 몸으로 마사이 촌의 양철 판잣집에 흑인 여인 한 사람과 자취를 하면서 진료소를 돌보았는데, 너무
무리를 해 급기야 병을 얻기에까지 이르렀다. 거처할 집이나 음식과 물의 지원을 제대로 못해 준 채 너무 희생적으로 봉사를 하게 한 것이다.
한국 선교의 초창기 때라 전미령 선교사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알게 모르게 무리한 고통을 당한 한국 선교사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전미령 선교사 다음으로 온 정현숙 선교사는 선교 사역의 여러 방면에서 아주 뛰어난 선교사였다. 그녀의 돈독한 신앙심과 지칠 줄 모르는 꾸준한
사역, 마사이 원주민들에게 보여 준 순결한 사랑은 내가 만난 한국 선교사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귀한 선교사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사이
사람들은 정 선교사를 모두 “천사”라고 부른다. 지금은 마사이를 떠나 네팔에서 남편 박웅현 목사님과 함께 선교를 하고 있는데 어디를 가거나
누구에게서나 “천사”라고 불릴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한국 선교가 급성장을 하고 있고 훌륭한 선교사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지만 선교가 생각하는 것만큼 모두 수월하고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시달릴 뿐 아니라 후원 교회와의 유대 관계 때문에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 선교사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선교지에서
겪는 어려움 중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육체적인 고통보다 거의
10배나
크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커다란 스트레스는 선교사 자신뿐만 아니라 후원 교회들이 지나치게 큰 꿈과 기대를 갖고 있는 점이다. 힘에 겨운 목표를 조속한
시일내에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많은 선교사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가 하면, 자칫 좌절 의식이나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1년에
무려
10개의
교회를 세워서 매교회당 백 명의 교인을 만들어 보겠다는 무리한 계획을 세운다면, 많은 경우에 그렇게 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호언 장담하고 세운
계획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이 같은 과잉 목표를 세우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이다.
선교사들의 또 다른 스트레스로는 선교사는 완벽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다.
KEMAN
선교부도 이러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다른 한인 선교부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성장한 선교부일는지도 모른다. 특히
선교사들의 대인 관계와 금전 관리 문제, 그리고 여자 문제가 말썽이 되어 후원 교회와 어려움을 겪었다.
선교사들의 대인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한국 선교사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선교사든지 다 겪는 일로서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들로 누구나 자기의 목표와 주장이 뚜렷하다. 이렇게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들끼리 잘 융화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 잘 어울리는 무난한 성격이라면 아마 특별한 사명감이 필요한 선교사와 같은 일에 선뜻 나설 용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개성이 강해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일지언정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선교사로 사용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복음을 얼마나 잘 전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선교사의 성격이나 대인 관계 또는 재정 관리 능력 등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기는 성격이나 재정 관리 등과 자질이 좋은 선교사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이런 것을 경시해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 선교사들의 이와 관련된 불찰로 선교비를 끊어 버린다거나, 선교 사역을 계속하지 못할 만큼
선교사들에게 타격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KEMAN
선교부가 대인 관계, 재정 관리, 여자 문제 등에 관련해 좋지 못한 풍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에서는 이러한 풍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조사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후원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교회내에서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잘못된 일은 처음부터 고쳐 나가야 한다는 주장과, 약간의 잘못은 일일이 캐내지 말고 너그럽게 덮어 주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로 한 첫째 이유는, 수술을 꼭 해야 할 환자라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수술을 하면 견디지 못하고 죽을 위험이 있을 때에는
수술을 하지 않고 약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 교회가 후원을 중단하면 선교부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둘째로 우리들은
KEMAN
선교부와 선교사들을 지극히 사랑했다. 사랑은 맹목적이라더니 비록 실수와 부족함을 드러낸 그들이지만 그들을 향한 사랑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사랑은 비현실적이고 지혜롭지 못한 선교 정책이라고 비난을 받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지혜로운 일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 다섯 사람의 단기 선교팀은 이러한 사랑의 마음가짐으로 선교지로 떠났다. 그러니 선교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현지에서 땀흘려 일하는 선교사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의료 사역과 주일 학교 사역은 오히려
2차적인
의미를 지녔다.
마사이 촌은
6년
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없던 가시 철망 울타리들이 여기저기 쳐져 있는 것을 보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는
아무도 땅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땅, 네 땅의 구분이 없었는데 나라에서 토지 분배를 시작하면서 자기 땅이라는 소유 의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마사이 사람들은 자기 땅에 대한 의식을 갖고 살지 않지만 이따금 가시 철망으로 된 울타리들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이곳 원주민들은 소와 염소 떼를 치며 산다. 예전에는 푸른 초장을 따라 이동을 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한곳에 정착해서 산다. 그러므로 소
떼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는 꽤 먼 거리까지 소 떼를 몰고 다녀야 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심히 건조한 지방이라 시원한 물줄기와 좋은 풀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히 먼 거리까지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 군데 군데 둘러쳐져 있는 가시 철망은 참으로 생경(生硬)스럽게만 느껴진다.
마사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넓은 광야에,
KEMAN(모든
민족 선교회)이 양철로 간이 건물을 지어 교회와 학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1986년
천막을 치고 환자 진료를 시작한 후로
3개의
진료실을 갖춘 진료소를 세웠다. 반은 석조로 지어진 이 부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버젓한 건물이다.
진료소가 있는 오리니에 동네를 위시해
5개의
마을을 순회 진료를 하며 말씀을 전하는데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아직 자동차 길이 나 있지 않은 산길이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까지
걸어가는데 한 시간씩이나 걸린다. 이곳에 필리델피아 한인연합교회에서
1년에
한 차례 혹은 두 차례씩 단기 선교팀들이 와서 봉사를 했는데 그 동안 약
50명
정도가 다녀갔다. 봉사라고 해야 고작
2주일간이니까
무슨 큰 공헌을 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단기 선교팀들은 짧은 여행을 통해서 선교에 관한 많은 것을 배우고 또한 현지 선교사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곤 한다.
단기 선교의 참뜻은, 첫째로 단기 선교에 참가한 사람 스스로가 단기 선교를 통해서 선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교를 후원하도록
변화되는 일이요, 둘째로는 단기 선교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통해 교회가 도전을 받고 선교에 적극적이 되는 교회로 변화되는 일이며, 셋째로는 단기
선교에 가서 만난 선교사뿐 아니라 모든 선교사들을 더욱 잘 후원하도록 변화되는 일이다. 그리고 단기 선교에 참여했던 사람 중의 약
25%가
장기 선교사가 되며, 장기 선교사 가운데 약
75%가
단기 선교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사실은 단기 선교의 참뜻을 더욱 깊게 해준다.
우리 단기 선교팀 일행
5명은
오리니에 진료소 앞 넓은 뜰에 몇 개의 개인용 텐트를 치고 힐튼 호텔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부쳤다. 바닥에 얇은 매트리스를 깔았지만 건조한
지방이라 습기가 그리 많지 않아 지내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대신 물이 대단히 귀해
2주일
동안 샤워를 하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하였고 광야에서 화장실 쓰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특히 여자들은 화장실 가기를 꺼려서 웬만하면 참기 때문에
변비에 걸려서 고생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매일 새벽
6시
경건회로부터 시작해서 하루 내내 미리 치밀하게 계획한 일들을 열심히 끝내고 저녁 식사 후에는 다시 경건회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까 밤에는 나무 가지를 긁어 모아 모닥불을 지피고 염소 고기를 구우며 정답게 삥 둘러앉아 김철수 목사님의 멋들어진 기타
반주에
맞춰 찬양을 부르고 그날 있었던 일들과 각자의 신앙 경험을 나눈다. 그러노라면 점차 은혜의 물결이 일고 비록 삭막한 빈 들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뿌듯한 기쁨을 매일 맛보게 된다.
낮 시간에는 환자 진료와 주일 학교를 꾸려 나가는 일 외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틈나는 대로 찬양과 설교를 했는데, 특히 이번 단기 선교팀은
찬양이 강세였다. 염극용, 김영훈 장로는 선교지에 자주 다니게 되면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것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5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곤 열심히 연습을 계속해 이제 배운 지 채 몇 년이 안 되었지만 두 장로님이
2중주로
색소폰 찬송을 연주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며 은혜를 받는다. 특히 마사이와 같은 넓은 광야에서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색소폰 같은
금관 악기가 더욱 효과적이다. 미미는 플루트를, 수지는 기타, 그리고 나는 노래를 부르면
5명의
멋진 화음이 마사이 사람들을 황홀하게 한다.
환자 치료는 옛날 한국의 무의촌 진료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중환자들이 오면 기구와 시설이 없는 형편이라 제대로 치료를 해줄 수 없는데
2주일
동안 다행스럽게도 아주 위중한 환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85년에
처음 마사이에 왔을 때에는 마사이 원주민들 사이에 안질이 많았던 것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들이 사는 움막에 창문이나 환기통이 없는 데다 그
안에서 불을 지펴 음식을 해 먹으니 움막 안이 늘 매캐한 연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주민 거의 모두가 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그 후로 계속해서 안약을 사용하게 해주었더니
6년
만에 안질 환자가 많이 줄어들었다.
단기 선교팀의 멤버는 매번 바뀌지만 같은 교회팀이라는 것과, 염극용 장로가 매년 찾아오는 것으로 인해, 마사이 사람들은 우리를 호기심으로 한번
왔다 가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따뜻하게 반겨 준다.
이곳 사람들에게서는 누구나 암내 비슷한 야릇한 몸냄새가 풍기는데 처음에는 역겨워 참기 어려웠지만 그것도 몇 년을 지내고 보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마사이에 와서 그 독특한 냄새를 맡을 수 없다면 오히려 서운할 정도이다.
단기 선교를 출발하며 어떻게 하면 선교사들을 위안하며, 사랑과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사랑의 표시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아니 아주 미미한 사랑의 표현이 큰 희생을 주는 것 이상으로 감격적일 수도 있다.
우리 일행은 마사이에 머무는
2주일
동안 식사를 직접 준비해 우리 일행은 마사이에 머무는
2주일
동안 식사를 직접 준비해 현지 선교사들을 대접하고 설거지도 도맡아 하기로 했다. 지극히 작은 일이었지만 선교사들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다고 식사 준비를 할 때에 현지 선교사들이 가만히 앉아 지켜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상은 그들이 거의
식사 준비를 했지만 우리들의 작은 사랑의 표시가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음식을 준비하던 중에 여러 가지 잊지 못할 재미있는 추억 거리를 갖게 되었다. 정월 초하루를 마사이 오리니에 촌에서 지내게
되었다. 누군가가 설날인데 떡국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한다. 이 허허 벌판 광야에서 떡국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게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미미와 수지를 데리고 임시 부엌으로 쓰고 있는 양철로 만든 창고를 갔다.
2주일간
먹을 음식의 재료들을 뒤적거려 보니 마침 밀가루가 있다. 우리는 얼른 밀가루 반죽을 해 떡가래를 만들었다. 또 밀가루로 얇게 만두 피를 빚어 그
안에 소시지와 양파를 잘게 썰어 넣었다. 고기가 없어 대신 닭고기 맛을 내는 다시다를 넣고 끓이니 무엇이 되었겠는가? 떡국이 아니라 수제비
국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웃음꽃을 활짝 피우며 떡국 아닌 떡국을 기쁘게 먹었다.
마사이 동네에는 야채가 거의 없다. 기후가 건조한 지방이라 야채가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사이 사람들은 야채를 거의 먹지 않는다. 푸른 풀과
야채는 하늘이 소나 양과 염소를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이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먹으면 소와 양의 음식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어 옳지 않다는 이상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사이로 떠나기 전에 나이로비에서 장을 보면서 감자와 양파, 당근 등 야채를 꽤 많이 샀지만 깨끗이 손질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더구나
마사이는 물이 귀한 곳이라 씻을 물이 마땅히 없다. 그래서 야채는 껍질이 있는 것 외에는 모두 끓여서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누군가가 갑자기 신선한 야채 샐러드가 먹고 싶다고 한다. 내게 다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의 수제자가 된 미미와
수지를 데리고 당장 쉐프 샐러드(Chef
Salad)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나나, 오렌지, 당근, 오이를 썰어 큰 양푼에 담고 양파는 식초에 담가 매운 기운을 뺀 다음 함께 썰어 넣었다. 달걀도 삶고
소시지도 잘게 썰었다. 그런데 문제는 샐러드에 들어갈 드레싱이 없는 것이다. 이리 저리 생각 끝에 눈에 띄는 대로 양념을 모두 쏟아 부었다.
간장과 식초, 설탕, 후춧가루,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두어 방울 넣고 휘저었다. 모두들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양푼의 바닥까지 샅샅이 다 긁어
먹었다.
이런 시시한 일들이 단조롭고 무미한 선교지의 선교사들에게 잠시나마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아니 선교지에서뿐 아니라
서울이나 뉴욕에서도 이렇게 시시한 웃음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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