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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Dacca)에
도착한 것은
1994년
1월
16일
오후
9시경이다.
공항 세관을 통과할 때에 예상했던 대로 약간의 어려움이 닥쳤다. 강의용으로 가져 간 코닥 회사의 슬라이드 프로젝터와, 찬양을 위해 준비한 음향
장치
Peavey
PA
시스템과 마이크 등 전자 제품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비록 단기이지만 선교의 임무를 띠고 가는데 “와이로”로 돈을 주고 얼버무리고 싶지는 않았다. 영어가 서툰 세관원들에게 이 모든 전자 제품들은
강의와 찬양으로 사용할 것이고 선교가 끝난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가지고 출국할 것을 여러 차례 정성을 다해 설명을 했다.
다른 승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나가고 나 혼자 세관 통로에 남게 되었는데 이제까지 무뚝뚝하기만 하던 세관원들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갑자기
말씨가 부드러워진다.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러고는 “강의와 찬양을 마치고 돌아갈 것이다”라는 각서만 받고 내보내 주었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와 보니 마침 의료 선교회를 통해 미리 연락을 받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코딩톤(Herbert
Coding-
ton)이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초면이었지만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 밖에도 방글라데시 체류와 모든 일들을 코딩톤 선교사가 주선해 주었다.
수도인 다카에 머무는 동안 숙소는 한국 방글라데시 개발 협회(Korean
Development
Association
in
Bangladesh, KDAB)에서
한국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도록 코딩톤이 미리 주선을 해놓았다.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국 선교사들을 만난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각인데도 개발 협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장순호 목사님과 그 외 여러 한국 선교사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 준다.
2층의
넓은 방을 혼자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코딩톤 선교사는 코넬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1949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광주 기독 병원에서
25년간을
봉사한 한국통이다. 그 후
1974년부터
84년까지
10년간
방글라데시에서 봉사했다. 지금은 은퇴해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은퇴한 후에도
1년에
3-4개월씩
방글라데시에 머물면서 시내 빈민가의 작은 진료소에서 주로 결핵 환자를 돌보고 있다.
헙수룩한 옷차림에
70세가
넘은 고령으로 허리가 구부러지고 얼굴에는 짙은 주름살이 패어 볼품이 없지만 그의 맑은 눈동자와 온화한 말씨 속에는 인자함과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神聖)함이 꽉 들어 차 있다. 마치 성자를 보는 것 같은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그는 다카 시내에 있는 방글라데시 원주민들이 사는 싸구려 아파트에 살고 있다. 딱딱한 철판 침대와 의료와 선교 책이 수북히 쌓인 삐거덕거리는
나무 책상이
74세
의료 선교사의 가구의 전부이다.
다음날 아침 방사선과 강의를 위해 코딩톤과 미국 여자 선교사 한 사람과 함께 방글라데시 의과 대학을 방문했다. 코딩톤 선교사가 어떻게 광고를
했는지 방글라데시 방사선 학회 회원 전부와 의과 대학 의사들까지 합쳐
60-70명
정도가 모였다.
이곳 사람들은 오랜 기간 지배를 받아 온 영국의 영향 때문인지 격식을 무척 좋아한다. 방사선 학회장이 일어나서 인사 말을 하는데 꼿꼿하게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점잖게 말하는 폼이 마치 국회에서 연설을 하는 것 같다.
내가 맡은 강의 제목은 “진단 방사선의 근래의 발전”(Recent
Advances
in
diagnostic
radiology)이다.
그러나 기회만 주어진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었다. 이곳은
100%가
회교도이고 더구나 의과 대학의 강의이니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섣불리 예수님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당장 단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침내 내게 지혜와 용기를 주셨다. 방사선 학회장이 참으로 점잖고 긴 인사 말을 할 동안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그의
인사 말이 끝나고 나의 답사 차례가 돌아왔다.
“회장님과 여러분들이 부족한 이 사람에게 귀한 시간을 내어 주시고 강의를 하도록 허락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지만 동시에 미국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누구인지 또 왜 방글라데시에 왔는지 궁금하실 터인데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몇 말씀 제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여기저기서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나는 이야기를 다시 이어 나갔다.
“내가 어렸을 적에 한국은 전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집이 무너지고 먹을 것이 없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마 지금의
이곳 방글라데시보다도 더 가난하고 힘든 나날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공산주의의 침략과 폭행에서 헤어날 수 없을 때 미국 군인들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주었던 맛있는 초콜릿과 과자가 기억이 납니다.
“군인들뿐 아니라 선교사들도 와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었는데 교회에서 그들이 가르쳐 주는 재미난 성경 이야기를 듣고 찬송을
부르면서 나도 이담에 크면 부자 나라 미국에 가서 살았으면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이 마침내 실현되어
27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펜실베니아 대학 병원에서 방사선과를 전공하고 수련의를 마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펜실베니아 의과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고 아름다운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행복하게 지내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올 때에는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돈 많이 벌어 풀장이 딸린 그림 같은 집에서 근사한 자동차를 씽씽 몰고 다니며 잘 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며 차츰 나의 화려한 꿈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의 향락만으로는 참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영혼의 만족은 우리 힘으로 다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의 생명을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침내 저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응답으로 저에게 영생과 천국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는 어린 시절 미군들과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아와서 물질로써 또 하나님 말씀으로써 우리를 도와주던 일을 다시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저의 마음속에 ‘너가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나아가 사랑을 나누고 전하는 것이 옳지 않겠냐?’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저는
1984년부터
매년
2-3주씩
병원의 개인 휴가를 이용해 인도네시아, 케냐, 자이르, 인도, 러시아, 브라질 등 여러 나라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찾아갔고 마침내 이곳
방글라데시까지 오기에 이른 것입니다.
“저는 최근 미국에서 개발된 방사선 진단에 관한 다양한 치료 방법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또한 저는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으로 받은
넘치는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나누어 드리려 합니다.”
기나긴 인사 말을 마침내 모두 마쳤는데 장내는 아무 반응이 없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하다. 나는 이어 준비해 간 슬라이드 필름으로 최근의
방사선 진단에 관한 강의를 약
1시간
15분
가량 했다.
마침내 강의가 다 끝나자 회장님이 다시 일어나 내게 고맙다는인사 말을 전하며 기회가 허락한다면 내년에 다시 올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묻는다.
뜻밖의 말에 나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 왔다. 연이어 의과 대학 방사선과 주임 교수가 일어나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내일 다시 와서 방사선과
수련의들에게 강의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래서 다음날 다시 두 시간 남짓을 강의하고 다시 그 다음날 또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사흘을 계속 나갔다.
그 다음날 다시 또 부탁을 받았으나 마침 치타공 의과 대학에서 선약이 되어 있어 더 이상은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계속되는 강의 제의에 나의 마음은 어린 아이처럼 들뜨고 기뻤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감동으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첫날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코딩톤 선교사가 내게 건네 준 말이다. 그는 자신이 알기에 방글라데시 의과 대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기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나를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을 곰곰이 새겨 보았다. 오랜 세월 이곳에서 선교 활동을 펼쳐 온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한 의과 대학에서 나는
어찌하여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었는가? 그들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내가 어찌하여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인가?
한동안을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해답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보다 내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바로 부족한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원주민들이 미국이나 영국 사람을 경원시하고 적대시하는 반면에 전쟁과 극심한 굶주림을 경험한 한국 사람인 나를 그들과 연민의 정이
통하는, 서로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수적인 회교도가 가득 자리를 메우고 있는 정부 의과 대학에서
감히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굳이 한국이라는 동방의 자그마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기억도 뚜렷이 갖고 있지 않다. 이런 다소 부정적인 생각은 어린 시절을 일제의 침략 아래 보내고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동란을 겪으며 한국에 대한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보다는 힘들고 고생스런 기억이 더 많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곳 방글라데시에서 새로운 귀한 경험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곳 의과 대학에서 어렵지 않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비로소 처음으로
하나님께 내가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때론 크고 화려한 것보다도 작고 초라한 것을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고
하나님 앞에 더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경험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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