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  

 

  

세계 각지로 선교 여행을 두루 다니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자주, 그리고 더 가깝게 듣게 된다. 페루에서도 순간 순간, 고비 고비 하나님은 나타나시어 우리 여행을 일일이 도와주셨다.

 

남아메리카 대륙은 모두가 가톨릭을 믿는다. 가톨릭은 신교와는 다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는 의미에서는 다를 것이 없으므로 구태여 이미 복음화된 나라에 갈 필요가 무엇이겠는가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품어 왔다. 그러나 2년 전 브라질에 다녀 온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첫째는 가톨릭 신자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식뿐이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잠시 동안의 방문이었지만 남미 사람들의 순박하면서도 정열적인 태도에 강하게 이끌리는 듯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페루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복향 선교사가 페루로 와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해왔다. 김 선교사는 수년 전부터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여전도회 한나 전도회에서 후원을 하고 있는 선교사이다. 여전도회 회장 유기현 권사와 선교부 김영애 권사(나의 아내)가 페루를 방문하기로 하고 나는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페루는 남미에서 세번째로 큰 나라인데 동쪽은 아마존 정글로 향해 있으며 서쪽은 태평양에 연해 있고, 그 사이로 높은 안데스 산맥이 에콰도르부터 시작해 페루를 거쳐 칠레까지 길다랗게 뻗어 있다. 해변과 산악 지역, 정글의 다채로운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양업이 발달되어 있고 은과 동, 아연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풍부한 천연 자원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해 가난한 살림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페루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잉카족의 후예들이다. 또한 1500년대에 스페인의 침략을 받아 오랜 세월 스페인의 통치를 받아 왔다. 이 같은 역사적인 특성으로 페루는 잉카족들이 쓰던 키추아(Quechua)어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키추아어는 페루뿐 아니라 잉카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안데스 산악 지역과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지에까지 널리 통용되고 있다.

 

페루의 수도인 리마(Lima)에 밤늦게 도착해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레키파(Arequipa)로 출발하기 위해 리마 비행장으로 향했다. 김복향 선교사가 일부러 리마까지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 이외에도 리마에서 사역하고 있는 또 다른 간호 선교사 이지아양, 페루의 한인 선교사 이춘현 목사님 부부, 우리 일행 3명, 이렇게 모두 7명이 함께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낮 12시 비행기다.

그런데 김 선교사의 말에 따르면, 페루에 살고 있는 10여 년 동안 국내선 비행기가 정시에 떠나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보통 한 두 시간, 때로는 너덧 시간씩 연착을 하거나 아예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시에 취소가 되는 적도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2주일도 채 못 되는 짧은 선교 기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비행기가 정시에는 떠나지 못하더라도 과히 늦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비행기가 예정대로 12시 정각에 출발을 하는 것이 아닌가? 몇 시간이고 대합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기다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던 우리 일행은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가 정시에 출발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모든 일이 시시하고 부질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런 하찮은 일에서 행복을 찾기를 애쓰면 하루 하루의 삶이 더 윤기가 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 같은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 기쁨은 더 한층 커지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그 기쁨은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작은 일 가운데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겨진다.
 

아레키파로 향하는 비행기를 정시에 출발하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은 페루 여행 중에 기적 같은 버스를 보내 주기도 하시고, 당나귀 여행의 잊지 못할 낭만의 추억도 허락해 주셨다.

아레키파에서 며칠간의 노방 전도를 마치고 만년설이 뒤덮인, 높이가 5,843미터(17,809피트)나 되는 미스띠 산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비라꼬(Viraco) 동네를 향해 3일간의 방문 길에 올랐다.

 

소형 트럭에 우리 일행과 아레키파 교회 목사님과 교인들까지 모두 합쳐 16명의 인원과 3일 동안 먹을 양식, 전기 발전기, 의약품 등 어마어마한 무게의 짐을 실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높다란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가는데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길은 가파른 천길 낭떠러지 아슬아슬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길은 포장이 안 된 울퉁불퉁한 자갈길인데 넓이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이다. 반대편에서 자동차가 오면 두 차가 모두 정지하여 두 대의 자동차가 지나갈 만한 넓이의 길까지 한 대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대관령 산길이 험하다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나무가 들어 차 있고 또한 자동차 두 대는 너끈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어 그리 무섭지는 않았는데, 비라꼬로 가는 이 길은 정말 간이 서늘해질 만큼 아슬아슬하다.

그렇게 가슴을 조이고 있던 중에 마침내 무리한 하중을 이기지 못한 트럭이 길 한가운데서 펑크가 났다. 마침 새 바퀴가 있어 갈아 끼우기는 했다. 그런데 본래 바퀴보다 작은 사이즈여서 든든하지가 못하고 더군다나 이 같은 험한 길을 다시 출발하기에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따금 자동차가 지나가지만 16명의 인원과 엄청난 물량을 보고는 아무도 태워 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런데 이 높은 산길에 버스가 운행된다고 한다. 하루에 두 번 지나가는데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으며 혹 지나간다 하더라도 만원이 된 버스라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모두들 산자락 여기저기 돌무더기에 흩어져 앉아 두 손을 꼭 부여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갑자기 버스가 온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기도를 시작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은 듯 싶다.

버스는 승객이 채 절반도 차지 않았다. 트럭을 운전하던 김병균 선교사와 페루인 한 사람을 조수로 남겨 놓고 우리 일행은 음식과 장비, 의약품을 모두 싣고 버스에 올랐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또다시 본 것이다. 우리는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을 에벤에셀의 하나님이라 불렀다.

우아미라는 마을에는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감자와 옥수수 농사가 잘 된다. 이 지방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산에 나무와 풀이 없이 누렇고 뿌연 허허 벌판뿐인데, 이곳에서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낭떠러지 아래쪽에 있는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흐른다. 높은 산에 있는 눈이 녹아 흘러서 생긴 물이라고 한다. 물이 살갗을 에듯 차다. 마침 이곳에서 페루 원주민 11명의 세례식이 베풀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나도 동참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개울물이 흐르는 계곡에 살지 않고 산 꼭대기 가파른 산 위에 집을 짓고 산다. 우리의 이동식 진료소와 부흥 집회 장소도 물론 높은 산자락에 자리 잡았다. 세례식이 있는 곳은 산 아래쪽 물이 있는 곳인데 그리로 내려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낭떠러지 길에 굵은 자갈이 깔려 있어 험하기 짝이 없다. 발을 헛디디지 않으려고 다리에 어찌나 힘을 주고 걸었던지 다른 사람들은 20분이면 내려간다는 거리를 두 배도 더 걸려 내려오니 두 다리가 주저앉을 듯이 후들거리고 힘이 쭉 빠진다.

겨우 겨우 기운을 차려 원주민 마리오 목사님을 도와서 세례식을 베풀었다. 이곳의 세례식은 온 몸을 물 속에 완전히 담그는 것이다. 11명의 세례자가 띄엄띄엄 도착을 해 세례를 다 마치는 데 두어 시간이나 걸렸다. 눈 녹은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한 몸은 어느새 완전히 얼음장으로 변했다.

세례식을 무사히 다 마치고 젖은 옷을 새것으로 갈아입고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출발도 하기 전에 기가 막혀 온다.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해 산길이니 빨리 서둘러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콧속이 밍밍하니 온 몸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오고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내 걱정을 하는 눈치이다.

 

그런데 이때 마침 환상처럼 내 눈앞으로 한 마리의 당나귀가 나타났다. 마치 꿈 속에서처럼 저 당나귀를 타고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당나귀 주인이 선뜻 당나귀를 내어 주며 얼른 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물론이려니와 마리오 목사님과 김복향 선교사,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나는 염치를 불구하고 난생 처음으로 당나귀 등에 올라탔다.

이리 저리 비탈진 산길을 당나귀 등에 태워져 오르는데 문득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수양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모리아 산에서뿐 아니라 페루의 산에서도 우리를 위해 당나귀를 예비해 주신 하나님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 불렀다.